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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리로 산다는것...

버들라인 2009. 1. 28. 08:22

결혼을 앞둔 딸

요즘 세월이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걱정이 앞선다.

일과 가정 두가지를 완백하게 해야 한다는것 결코 쉬운것이 아니다.

평생 일을 하면서 며느리로 산다는것  쉽지가 않았는데 아이가 만나게될 배우자는 좀 사람 귀한집이 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다.

 결혼전

 늘 허약해 부모님 애를 태우게 했다.

"첫술에 채한다. 꼭 꼭 잘 씹고 물부터 먹어라."

육남매중 둘째딸인 난  아버지 맞은편에  겸상 자리 , 늘 부모님 두분  애틋한 사랑에  행복한 유년을 보냈다. 

부모님 기대치에  어긋나지 않은 딸

난 늘 사촌까지 12명의 동생들에게 귀감으로 살아야했다.

친지들 기대 속에 살던  나는   내 일의 파트너의 소개로 남편을 만나고

 겁도 없이  육남일녀 중 세째 자리에  부모님 반대에도 결국 내 고집으로 결혼을 하였으니

부모님 삼춘 내외분  참 맘 상하게 했다.

 

경상도 토박이 시댁

명절이면 삼일 밤낮을 앉을 사이도 없이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대가족

용심 많은 시어머니 , 시고모님 다섯분  시동생들  손위 시숙 두분

마시고  즐기는 유흥 ,  친정에서는 볼수 없는 모습이었다.

며칠씩 지내다  친정을 왔을때

"세상천지  이런일이 어디 있노?

 명절 다 끝나고  보내는 사돈 심술, 삼춘이  너거 오나 싶어 이틀전 부터  매일 대문 처다 보고 하더라.

우째 그리 무지막스럽노.   이런경우는 없다.."

참다 못한 친정숙모께서  남편에게  따졌으니  .....

남편과 난  늘 명절 이삼일이 지나야만  시댁을 빠져 나올수 있었다.

 

 

  간경화 재발로 병원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추석이 다 될 무럽 , 회복하여 집에 계실때 바다길이 멀다는 핑계로 마음만 애태웠다.

  집에서 추석을 지내셨지만  보고 싶은 맘에 전화만 드릴수 밖에 없었던   용기 없던 나.

시부모님 남편 어느 누구도 내 나음 헤아리지 못하셨다.

 

차례를 지내고 지금도 생전에 계시는 시고모님 병문안을   시어머니 모시고  가야했었다.

늘 그런식인 부모님께 말한마디 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명절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와  울산에 있는 사촌 시누이집에 명절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온  뒷날

새벽

전화소리에 불길한 예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응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둘째 걱정한다 열락 말아라."라는 말씀이 마지막 말씀이라 한다.

정신 없이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시댁으로 갔을때

"애미야 미안하군아......"

시부님의 말씀

 

그 다음해

 첫 기제사날이지만  추석이 되어도  아무말도 없으시는 시모님

모든것이 화가 났지만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친정엔 어머니께서 아버지 제사를 위해 음식을 직접  하실탠데 ........

음식을 하는 내내  마음이 쓰였다.

아무리 이해를 하려해도  할수가 없었고  그렇게 내 속에 화를 참고만 살아야했다.

시부모님께  내 진실이 전달 되지  않아서 일까.

난 두분께  늘 친정 부모님께 하듯 진실을 드리고  생활습관이 다른 시댁 식구들 마음으로  다하였는데

결국 그랬던 것이다.

며느리 아픔은 안중에도  없는것 같은  느낌에 내 맘을 차갑게 했다.

 

이제 나도  남의 귀한 자식을 둘을 드려야 하는 입장이다.

난 그아이들에게  내 맘을 주고 싶다.

마음을 헤아리며 서로 아끼며 사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