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불경기가 실감이 난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지출을 자제하는것 같이 보인다.
11월 한참 겨울 주문에 바쁘게 시간을 보내야 할때이지만 잠깐의 시간 여유에 컴 앞에 앉잤다.
이곳 저곳을 방문하면서 꼬리글도 달고 미루어 두었던 친구의 북한 방문기를 마져 읽게 되었다.
북에서 찼는 삼춘의 요청으로 지금에서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긴 글을 읽으며 난 외삼춘과 고인이 되신 외할머니를 생각했다.
어린시절 우리집엔 미제 제니스 라디오가 있었다.
미국에서 중고로 들어온 라디오를 가난하던 그시절 거금을 주고 샀던것이다.
아버지께서 퇴근 하시면
"영숙아, 라디오를 커라.." 하신다.
그당시 대여섯살 되었던 나는 의자에 올라가고 그다음 책상에 올라가서 손을 뻐쳐서 라디오에 손이 다았다.
산골이지만 성능이 좋아서 잡음이 없이 맑은 방송을 들을수 있었다.
보수적인 아버지 늘 뉴우스 시간이 지나면 라디오를 끄고 했지만 어린 나에겐 신비했다.
봄이 되면 늘 외할머니께서 꽂감 그리고 누룩, 그외 여러가지를 가지고 우리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보름정도 계신다.
황지에서 광산을 하시는 할머니의 동생 할아버지댁에서 며칠 계시다가 다시 우리집으로 오신다.
늘 틈만 있으면 "이북방송을 틀어봐라.."
"할머니 이북방송 들으면 간첩이라고 잡아가..."
이렇게 우리집에 오시면 이북방송을 듣기 원하셨다.
그때 우리집에서는 체널을 돌리다 보면 쉽게 북한방송이 잘 잡혔다.
육이오 후퇴때 친구에게 포로가 되어 부득히 이북으로간 외삼춘 소식을 혹시나 하고 듣게 될까해서 그랬던것이다.
아들소식에 목을 매이시며 늘 기다리셨다.
딸 5을 두시고 외아들로 외삼춘을 두셨는데 대구 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던 외삼춘을 고향 문경으로 오게 하셔서
군청에 근무하셨다고 한다.
그네들이 장악했는때는 만석군 살림 그리고 군청 요직 공무원 총살 되셔도 되었지만
친구의 덕분에 총살을 면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후퇴때 압송 된것이다.
칠순을 넘긴 언니들
남북의 만남이 시작될 무렵 우리가족도 혹시나 하고 기다렸다.
"나 아버지...하고 한번만이라도 불려 보고 싶어 .." 하시던 큰 언니의 눈물 글썽이던 모습이 생각이 난다.
이잰 다 잊은듯 하지만
우리 어머니 가슴에도 오빠의 그리움이 자리잡고 있다.
외할머니께서는 늘 북한 소식을 물으시고 98세란 나이까지 아들을 기다리셨다.
참 한 많은 애달픈 삶을 사신 할머니
이시대를 사셨으면 또 혹시 하는 마음에 가슴을 졸이고 사셨겠지.
흔하게들 보는 가족사,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닌가.....